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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c/일기는 일기장에8

[책 이야기] 책꽂이에 잠자는 네모난 평행세계들 책을 읽을 때는 내가 아닌 누구라도 될 수 있었지만 또한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그런 가장 먼 곳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책과 음악, 영화는 그렇게 좁은 곳에 갇혀 살던 시간을 무한대에 가깝게 늘려주는 매개체였다. -우먼카인드 vol.1 '나를 만드는 법' 이다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서점을 좋아했다. 수많은 책이 내 키보다 높이 쌓여 있는 모습이 황홀했고 페이지마다 스며 나오는 잉크의 냄새가 아찔했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거라고, 늘 생각했다. 물론 책을 읽는 장소는 주로 방구석이었지만. 왜냐면 서점에서는 책을 읽는데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 권만 잡고 읽기에는 책이 너무 많았다.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보고 싶고... 그래서 책을 구경하고 고르는 데에만 몇 시.. 2019. 10. 24.
[책 이야기] 나의 소녀시대 판타지 어렸을 때 판타지 소설을 쓰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조각난 세계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대로 끄적거려 놓은 것이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최고의 현실도피였다. 여성만이 존재하는 은하계에서 외계의 총지도자로 성장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 악의 무리와 싸우는 용감한 동양인 소녀가 등장하는 국제 마법학교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을 하나하나 죽여나가는 잔인한 연쇄살인마 소녀 마법세계 최고의 악당이 되는게 꿈인 야심가득찬 소녀 세상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허무주의로 가득한 고딩소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소녀의 이야기였다. 숱하게 읽어온 판타지 소설 속 비범한 주인공 소년 옆의 연애 상대나 엄마가 아니라!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소설 속에는 항상 소년이 나왔다. 그 옆에 있는 소녀의 이미지는 조연에 그치거.. 2019. 4. 15.
[의대 일기] 법의학: 사람을 죽이는 가장 완벽한 방법 우리 학교는 법의학 교실이 개설되어 있는 관계로 1학년 때 법의학 수업을 듣는다. 국내외 미디어에서 많이 다룬 주제라 의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법의학이 무엇인지는 대충 알고 있을 것이다. 법의학 수업에서는 인체의 손상(결과)을 보고 그 원인을 추정하는 법을 배운다. 드라마, 영화와 달리 법의학은 어떻게 죽었는가?를 다루지 왜 죽였는가?를 다루지는 않는다. 분석 결과를 검찰에게 넘겨 재판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할 뿐이다. 철저하게 중립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체에 점모양의 출혈, 암적색의 피, 장기에 고인 혈액이 발견된다면 사망 원인은 질식사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어떤 형태의 질식인지는 시체에 남은 물리적, 화학적 흔적을 통해서 추정하게 된다. 질식사의 원인은 매우 다양한데(끈.. 2019. 2. 25.
[의대 일기] 화이트 코트 세레머니: 인간 동물원 속 어른되기 의과대학에는 '화이트 코트 세레머니'라는 행사가 있다. 의대 3학년이 되어 병원실습(폴리클, PK)을 돌기 전에 하는 행사로 의대생이 공식적으로 첫가운을 입는 날이다. 학교마다 세부적인 사항은 차이가 있지만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교수가 학생에게 가운을 입혀주고 청진기를 목에 걸어주는 타임이다. 옛날부터 곰곰이 생각해보던 건데 입학식, 졸업식을 포함한 집단의 크고 작은 행사는 왜 필요한 것일까. 입학식과 졸업식이 없어도 우리는 학교를 잘 다닐 수 있다. 화이트 코트 세레머니 없이도 우리는 가운을 잘 입을 수 있고 병원 실습을 돌 수 있다. 실질적인 교육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러한 행사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인간 동물원(1969)"에서 굉장히 시니컬하게 .. 2019. 2. 21.
[책 이야기] E-book과 종이책 비교: 책 넘기는 '맛'? 나는 책을 볼 때 보통 E-book을 선호한다. 종이책만 나와있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E-book이 있을 경우 무조건 E-book을 구입한다. (잡지는 예외) E-book으로 책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와서 묻는다. 제일 많이 듣는 소리는 다음 세 가지다. "눈 안 아파?""책 넘기는 맛이 없지 않아?""E-book으로 책 보는 거 괜찮아?" 이 글에서는 저 세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E-book과 종이책을 비교해보려고 한다. 먼저 밝혀둘 사항 두 가지-내가 E-book을 보는 기기는 아이패드 프로(레티나 디스플레이 탑재 모델).-E-book 리더기에 대해서도 들었지만 사용해보지 않아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힘듦. 한 번 본 적은 있는데 디스플레이가 지저분하고(눈에 피로하지 않은 디지털 잉크를 사용해서.. 2018. 5. 22.
[책 이야기]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곰브리치를 넘어서 몇 년 전, 나는 파리에서 약 10일 간 머물렀다. 내 파리 여행의 주제는 ‘그림’이었고 파리에 있는 모든 미술관을 돌아보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 나는 대학에서 배운 미술사 지식들, 특히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The history of art)"를 통해 무장 된 상태였다. 어떤 그림이든 보고 즐길 자신이 되어있었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미술관인 루브르는 여행 내내 방문할 생각이었다. 파리에서 나의 아침 일정은 항상 루브르 방문이었다. 처음 방문한 날 루브르는 나의 기대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그 거대한 루브르는 나를 황홀하게 했지만 울게도 했으며, 동시에 나를 철저히 절망하게 했다. 루브르에 방문한 지 며칠 째가 되었을까. 회화관을 다 돌고 토속 예술품 전시관을 돌며 나는 머릿속이 서늘해지기 시작하기 .. 2018. 5. 18.
[책 이야기] 중2병과 '책'이라는 도피처 열다섯 살. 나는 중2병이 심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세상이 너무 시시했다. 또래들의 시시껄렁한 대화라든지 그 미성숙함(이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다)이라든지 모든 게 우스워보였다. 그렇다고 어른들과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다. 내 눈에는 어른들 모두 세상에 물들어 타락(!)한 것 같았다. 어른들은 더러워. 꿈이라든지 철학이라든지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나 혼자 특별한 것 같았고 그런 나를 세상이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또래들과 어른들에게 나는 배울 것이 없다고 느꼈다. 정말, 중증 중2병이 따로 없었다. 그런 나에게 책은 최고의 도피처였다. 책가방에는 그 날 학교에서 읽을 책 한권만이 달랑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세상을 배워가기에는 충분한 무게였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걱정.. 2018. 5. 10.
[책 이야기] 책 안 읽는 사회에서 독서광이 된다는 것 네이버 뉴스에 '독서량'이라고 검색을 하면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뜬다. 2030 성인남녀 1년 평균 독서량 '13.7권'동영상에 빠진 2030 … 3명 중 1명 "책 안읽는다"문체부, 성인 연간 독서율 59.9%…독서량 8.3권 집계지난해 성인 평균 독서량 10권…한 달에 1권도 어려워책과 담쌓는 시민들…성인 절반 "지난해 독서량 0권"15년째 불려나오는 고은, 한국인 독서량은 하루 6분 대한민국은 '책 안 읽는 사회'다. 1년에 저만큼 읽었다는 말도 사실 잘 믿기지 않는다. 어느 날부터 학교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인터넷서점 ebook 판매순위에는 판타지, 로맨스, 라노벨, 만화책, 성인용..들로 가득하다. 1년 간 읽는 책의 권수를 우리가 생각하는 ‘고전적.. 2018.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