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에는 '화이트 코트 세레머니'라는 행사가 있다. 의대 3학년이 되어 병원실습(폴리클, PK)을 돌기 전에 하는 행사로 의대생이 공식적으로 첫가운을 입는 날이다. 학교마다 세부적인 사항은 차이가 있지만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교수가 학생에게 가운을 입혀주고 청진기를 목에 걸어주는 타임이다.
옛날부터 곰곰이 생각해보던 건데 입학식, 졸업식을 포함한 집단의 크고 작은 행사는 왜 필요한 것일까. 입학식과 졸업식이 없어도 우리는 학교를 잘 다닐 수 있다. 화이트 코트 세레머니 없이도 우리는 가운을 잘 입을 수 있고 병원 실습을 돌 수 있다.
실질적인 교육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러한 행사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인간 동물원(1969)"에서 굉장히 시니컬하게 이야기한다.
오늘날에는 사실상 교육제도 전체를 통하여 강력하고 인상적인 형태의 초부족 성년식이 한 가지 존재한다. 이 성년식은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생략) 대학교에서 마지막 시험이 끝나면, '시험에 통과한' 학생들은 초부족의 특별한 어른이 될 자격을 얻는다. 이들은 그것을 과시하는 의상을 차려입고, 그보다 훨씬 인상적이고 극적인 의상을 입은 원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학위 수여식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의식에 참가한다.
*여기서 초부족(Super-tribes)은 익명성이 지배하는 현대의 인간집단을 말한다.
의대에서의 1, 2학년 생활은 악명이 높다.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공부에 찌든 의대생'의 모습은 거의 1학년이다. 2학년이 되면 조금은 나아지지만 여전히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세어보니 나는 지난 2년 간 의대 생활에서 약 100번의 시험을 보았다.
3학년에 되면 더 이상 강의실에서 이론 수업을 받지 않는다. 이론 수업과 시험이 모두 끝나고 본격적으로 병원 실습에 들어가기 직전에 화이트 코트 세레머니를 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3학년들은 모두 번듯하게 꾸미고 차려 입고(주로 정장 패션) 강당에 모여 교수들의 축하사를 듣는다. 가족들이 참여해 축하해주는 경우도 흔하다.
'가운을 입는다'는 흔한 행위는 화이트 코트 세레머니로 과장되고 우리는 비로소 병원의 구성원으로 공식 인정받는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관점을 빌리자면 이것은 일종의 성년식이다. 과거 부족의 성년식은 현대 초부족에게 어울리는 형태로 변형되어 내려왔다. 이 성년식을 통해 개인은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성년식을 통해 개인은 전통의 울타리에 들어가게 되며 집단은 유지된다.
우리가 어떠한 행위를 시작하거나 그에 가담하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주체적이지 않으며 의식적으로 행동하지도 않는다. 과거 조상부터 내려오는 유전자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의식에 우리를 가담하게 하고 전통에 대한 우리의 의문을 잠재울 만큼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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