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나는 파리에서 약 10일 간 머물렀다. 내 파리 여행의 주제는 ‘그림’이었고 파리에 있는 모든 미술관을 돌아보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 나는 대학에서 배운 미술사 지식들, 특히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The history of art)"를 통해 무장 된 상태였다. 어떤 그림이든 보고 즐길 자신이 되어있었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미술관인 루브르는 여행 내내 방문할 생각이었다. 파리에서 나의 아침 일정은 항상 루브르 방문이었다. 처음 방문한 날 루브르는 나의 기대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그 거대한 루브르는 나를 황홀하게 했지만 울게도 했으며, 동시에 나를 철저히 절망하게 했다.
루브르에 방문한 지 며칠 째가 되었을까. 회화관을 다 돌고 토속 예술품 전시관을 돌며 나는 머릿속이 서늘해지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 넓은 루브르 한 전시실에서, 어디서 가져온 지 알 수 없는 아프리카 전통 미술품들이 가득한 방에서, 창밖에서 쏟아지는 늦은 여름 햇살 속에 엉켜 뒹구는 먼지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며 나는 서 있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서서 이집트 유물관 입구에 있던 스핑크스를 생각했다.
반인반수에게는 너무나 좁고 낮은 그 입구에서 스핑크스는 코가 잘린 채 노란 조명에 박제되어 있었다. 기대와 달리 스핑크스는 나에게 수수께끼를 던지지 않았다. 그것은 흡사 동물원 속 사자 같았다. 스핑크스를 넘어, 스핑크스가 지키려고 했던 이집트의 고대유물은 이미 깨끗하고 현대적인 유리 상자 속에 수호되고 있었다.
루브르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곰브리치는 무엇을 이야기했는가. 우리의 미술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걸까. 곰브리치의 해석을 달달 외운 채 지구 반대편 그림 앞에 서서 태양열 인형처럼 맞아맞아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나는 곰브리치 “서양미술사(The history of art)"라는 제목이 주는 오만함과 내가 가장한 고상함에 대해 생각했다.
루브르에서 나의 가슴을 떨리게 한 것은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아니었다. 밀로의 비너스도 아니었고 계단 위 니케의 반쪽날개도 아니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캔버스 위 물감의 질감과 붓이 지나간 자국, 그린이의 날카로운 눈과 집념이었다. 나는 그들이 스케치 위로 밑색을 깔고 나서 느꼈을 감동을 보았다. 원하는 대로 붓이 움직여줄 때의 쾌감을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수많은 그림 사이에서, 예술가들 사이에서 나는 나의 모습을 찾았다. 나는 고상한 감상자가 아니라 물감 냄새가 나는 예술가로서 있어야 했다. 그것이 나의 자존이었다. 그 누구의 해석도 필요 없었다. 그냥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 날로 곰브리치를 머릿속에서 지웠고 여행 첫 날 산 루브르 박물관 도록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루브르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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