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
나는 중2병이 심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세상이 너무 시시했다.
또래들의 시시껄렁한 대화라든지 그 미성숙함(이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다)이라든지 모든 게 우스워보였다.
그렇다고 어른들과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다.
내 눈에는 어른들 모두 세상에 물들어 타락(!)한 것 같았다. 어른들은 더러워.
꿈이라든지 철학이라든지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나 혼자 특별한 것 같았고 그런 나를 세상이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또래들과 어른들에게 나는 배울 것이 없다고 느꼈다.
정말, 중증 중2병이 따로 없었다.
그런 나에게 책은 최고의 도피처였다.
책가방에는 그 날 학교에서 읽을 책 한권만이 달랑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세상을 배워가기에는 충분한 무게였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걱정했지만 결국에는 '문학소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나는 그 문학소녀라는 말이 싫었다.
그 말이 주는 유리 같은 섬세함과 상처입기 쉬운 백합 같은 느낌이 싫었다.
그 당시 나는 맹렬했고 거칠었다.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고 기괴했다.
나는 끊임없이 몰아치는 사고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서서 알을 깨고 나가고자 하루하루 투쟁했다.
나는 뫼르소였고 싱클레어였고 단테였고 파우스트였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완전히 외톨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하굣길에서 늘 단짝친구 A에게 그날 책에서 얻은 질문들을 던지고는 했다.
A는 책을 전혀 읽지 않았지만 나의 이야기를 곧 잘 들어주었다.
내가 시시하게 생각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우리는 매일 그렇게 길 위에서, 책 위에서 세상을 논했고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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