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판타지 소설을 쓰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조각난 세계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대로 끄적거려 놓은 것이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최고의 현실도피였다.
여성만이 존재하는 은하계에서 외계의 총지도자로 성장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
악의 무리와 싸우는 용감한 동양인 소녀가 등장하는 국제 마법학교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을 하나하나 죽여나가는 잔인한 연쇄살인마 소녀
마법세계 최고의 악당이 되는게 꿈인 야심가득찬 소녀
세상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허무주의로 가득한 고딩소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소녀의 이야기였다.
숱하게 읽어온 판타지 소설 속 비범한 주인공 소년 옆의 연애 상대나 엄마가 아니라!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소설 속에는 항상 소년이 나왔다. 그 옆에 있는 소녀의 이미지는 조연에 그치거나 흐렸다. 그러나 내 소설 속에서는만큼은 소녀가 주인공이었다. 내 소설 소녀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용감한 소녀, 천재 소녀, 착한 소녀, 나쁜 소녀, 영리한 소녀, 야비한 소녀, 이상한 소녀, 약한 소녀, 강한 소녀, 꾀 많은 소녀, 아픈 소녀, 냉정한 소녀, 잔인한 소녀, 비참한 소녀, 따뜻한 소녀, 서투른 소녀, 배신자 소녀, 행복한 소녀, 위대한 소녀.
나에게는 소녀가 이끌어나가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네이버웹툰 '신의 탑' 희대의 나쁜 년 라헬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것도 나의 소망이 반영된 걸까.
나는 정말로 라헬이 잘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은 내가 어렸을 때 이후로 얼마나 바뀐걸까?
최근 다양한 문학상에 여성작가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보이고 있다.
나와 같은 꿈을 꾸던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읽은 책 속에서 소녀들은 어디로 간 걸까?
내가 읽은 책리스트를 가만히 보며 작가와 주인공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여성작가가 쓴 책은 가끔가다 한 두 편이었다.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은 더 적었다.
왜 때문이죠?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책편향이 있나보다.
반성하며 앞으로는 여성작가 혹은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책을 좀 골라 읽어볼 예정이다.
그 옛날 나의 마법학교에서 투닥거리던 정의로운 소녀 수아, 따뜻한 소녀 토나, 비열한 소녀 하늘, 건방진 소녀 로렌스, 그리고 어리버리한 소년 창현의 뒷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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