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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c/일기는 일기장에

[책 이야기] 책꽂이에 잠자는 네모난 평행세계들

by Zinc Finger 2019. 10. 24.
책을 읽을 때는 내가 아닌 누구라도 될 수 있었지만 또한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그런 가장 먼 곳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책과 음악, 영화는 그렇게 좁은 곳에 갇혀 살던 시간을 무한대에 가깝게 늘려주는 매개체였다. -우먼카인드 vol.1 '나를 만드는 법' 이다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서점을 좋아했다. 

Photo by  Alfons Morales  on  Unsplash

수많은 책이 내 키보다 높이 쌓여 있는 모습이 황홀했고 페이지마다 스며 나오는 잉크의 냄새가 아찔했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거라고, 늘 생각했다.

 

 

물론 책을 읽는 장소는 주로 방구석이었지만. 

 

왜냐면 서점에서는 책을 읽는데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 권만 잡고 읽기에는 책이 너무 많았다.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보고 싶고... 그래서 책을 구경하고 고르는 데에만 몇 시간이고 썼다. 정작 책 내용은 못 보고 책의 제목만 보거나 작가 이름만 봤다. 표지 그림은 어떤지 보고 책이 어떻게 분류되어 있는지 궁금해했다. 베스트셀러 책장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고 책 보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사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열심히 염탐했다. 가까스로 책 표지를 열더라도 본문까지 못 가고 목차와 프롤로그만 뒤적거리다가 여기서 다 읽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며 다른 책을 집어 들고는 했다. 심지어 모든 책에 대한 책이 있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다.

 

 

 

 

책 사랑꾼들은 대개 정보를 얻으려고, 시간을 보내려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혹은 C. S. 루이스의 말마따나 혼자가 아님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한결 흥미진진하고 살맛 나는 세상으로 도피하려고 책을 읽는다.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조 퀴넌

 

그래, 책을 구경하고 있으면 살 맛이 났다. 나는 그 당시 자주 우울하고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지만 책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했다. 몇 시간이고 책을 구경하다가 끝내 한 두 권 사들고 나올 때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 마냥 두근두근했다. 

Photo by  🇸🇮 Janko Ferlič - @specialdaddy  on  Unsplash

그러나 인터넷 서점이 커진 이후 서점들이 사라지며 책 구경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내가 자주 가던 서점이 없어지자 더 먼 서점에 갔고 그 마저 사라지고 나서는 시립도서관에 가야 했다. 도서관에서 책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대여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점점 발길이 끊겼다.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그냥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불속에 누워서 터치 몇 번만 하면 책이 내 문 앞까지 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점점 책을 사서 실제로 읽는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내가 구경하는 책은 훨씬 줄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참 동안 깨닫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존재하는 책들의 수를 고려할 때, 우리로서는 사서처럼 총체적 시각을 가질 것인지 아니면 책들을 하나씩 읽어나갈 것인지 하는 선택이 불가피하며, 전체를 통제한다는 측면에서 모든 독서가 힘도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에너지 낭비인 것이다. 이 입장의 지혜로움은 진정한 교양은 완전성을 지향해야 하며 국소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전체라는 관념에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서점에 죽치고 있으면 책을 읽지 못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책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나는 하나의 책을 만나는 대신, 수많은 책을 뒤적거리고 책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며 수만 권의 책을 만났다. 책과 책 사이 그리고 책장과 책장 사이의 세계를 보았다. 

Photo by  Stanislav Kondratiev  on  Unsplash

내가 서점을 사랑했던 이유는 책을 '읽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책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점, 도서관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이제 인터넷서점 장바구니를 비우고 서점에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언젠가는 반대로 책 배송 상자가 그립고 또 가벼운 전자책의 무게를 느끼고 싶은 날이 올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책 냄새를 좀 맡고 싶다. 책꽂이에 잠자는 네모난 평행세계들 사이에서 몇 날 며칠이고 길을 잃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