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면 안 읽은 책을 읽은 척 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만 같다. 김용석의 "읽은 척 매뉴얼(2009)"처럼 어려운 책을 요약해 놓은 책인걸까? 아니면 어떤 책이든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걸까?
뭐하는 책인가
책의 제목은 안 읽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려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책의 핵심은 우리가 '독서'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야한다는 것이다. 책을 첫 표지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읽어야만 진정으로 읽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에서 우리는 벗어나야한다. 우리는 직접 읽은 책이든, 슥 넘겨본 책이든, 귀동냥한 책이든, 읽다만 책이든, 전혀 읽지 않은 책이든 우리는 그에 대해 생각을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피에르 바야르는 대학교수인데 강의실에서 책 이야기를 할 때면 학생들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책을 읽지 않은 것을 창피해 하지 말고 그 모르는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런 혼란은 책을 신성시하는 태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을 교육이 충분히 수행하지 못해 '책을 꾸며낼' 권리가 학생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텍스트에 대한 존중과 수정 불가의 금기에 마비당하는데다 텍스트를 암송하거나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알아야 한다는 속박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내적 일탈 능력을 상실하고 상상력이 유익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을 스스로 금해버린다.
독서는 곧 비독서이다
저자에 따르면 책을 읽는 것은 곧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독서는 우선 비독서라 할 수 있다. 삶을 온통 독서에 바치는 대단한 독서가라 할지라도, 어떤 책을 잡고 펼치는 그 몸짓은 언제나 그것과 동시에 행해지는, 그래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 역의 몸짓을 가린다. 즉, 그 책 외의 다른 모든 책들, 어떤 다른 세상이었다면, 선택된 그 행복한 책 대신 선택될 수도 있었을 다른 모든 책들을 잡지 않고 덮는 몸짓을 가리는 것이다.
또한, 그 책을 읽었는가 읽지 않았는가는 실질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비독서' 라는 개념은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 이 양자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성립되지만 사실 우리가 텍스트를 만나는 다양한 형태들은 대부분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생략) 어떤 책에 대해 일정 시간을 보낸 사람들, 말하자면 그 책을 완전히 읽지는 않고 몇 시간 정도 뒤적거린 사람은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하는가?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책을 읽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 무엇이 중요할까?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대한민국의 독서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가겠다.
한국의 독서문화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독서를 매우 중요시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독서의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우리는 책을 읽고 토론할 때 그 책의 한장한장을 완전히 읽고 내용을 파악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왈가왈부 이야기하는 것은 허세로 여겨진다. 또한 그 책을 읽지 않고는 책 내용에 대해 제대로 된 주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되는 걸까? 그 책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할 얘기가 없어서? 책의 내용을 곡해할 우려가 있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1
: 내 이야기를 하라
어떠한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용을 모른다면 같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아니면 그냥 검색을 하면 된다. 목차를 보거나 발췌 된 부분을 읽어보고 이야기하면 된다. 검색엔진이 강력한 이 시대에 우리가 책에 대해 대화를 하게 된다면 그 대화의 진짜 목적은 책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이야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책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는 것, 혹은 책들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것ㅡ이것이 아마 책들에 대해 잘 말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ㅡ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런 상황들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달라진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2
책에 대해 읽지 않고 말하면 그 책을 왜곡하게 된다는 주장은 틀렸다. 이 주장은 책 해석에 정답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 책에 대한 한 가지 해석 만을 허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 가지의 텍스트를 열 사람이 본다면 열 개의 해석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심지어 작가조차 그 텍스트에서 읽히는 것과는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자신의 관념을 글로 정확히 전달 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질의 책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 독서에서 뽑아낸 조각들, 서로 뒤얽혀 있기 일쑤인데다 우리의 개인적 환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그 조각들을 기억한다.
모두가 책을 읽고 이야기하든 모두가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든 그 대화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모두 자신의 생각과 해석을 이야기할 것이다.
또한 세월이 흐르며 한 사람이 한 책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만들 수 있다. 어렸을 때 읽은 책과 어른이 되어 읽은 책이 분명 같은 책인데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 책을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책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변화했을 뿐이다.
우리가 화제로 삼는 책 모두가 사실은 하나의 '화면 책' 이요, 모든 책들의 연속이라는 그 끝없는 연쇄 속에 있는 하나의 대체 요소일 뿐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어떤 책에 대한 추억을 그 "실재" 책과 대조해보는 실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해보면 책들, 특히 우리의 일부분이 될 정도로 소중했던 책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당면 상황과 그 무의식적 목적에 따라 부단히 재구성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1943)를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치며 여러 번 읽었다. 어릴 적 나에게 어린왕자는 어드벤처물이었다. 그것은 작은 행성에 사는 또래 아이가 우주 곳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성장하는 동화였다. 그러다가 소설은 갑자기 사회비판물이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한 때 순수한 아이와 타락한 어른의 대립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본질에 대한 것과 피상적인 것에 대한 우화로 읽기도 했다.
지금 어린왕자는 눈물 쏟는 휴먼 드라마로 보인다. 지금 나에게 어린왕자는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린왕자는 한 명이지만 나는 어린왕자의 이야기에 대해 저렇게 해석을 붙여왔다. 그러나 나의 해석에 틀린 해석은 없다. 누가 자신 있게 어린왕자는 어떤 이야기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까? 생텍쥐페리가? 이 분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린 분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3
:모르면 모를 수록 더 잘 아는 법이다
분명히 읽지 않은 책이라고 해서 그 책들이 우리에게 이런 저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책들도 메아리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읽지 않은 책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영화, 드라마, 유튜브, SNS 등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채널은 무궁무진하게 많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책이 주는 메아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세계의 석학들은 트위터보다는 여전히 책과 글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석학들의 이야기가 정책이 되고 지도층의 이념이 되며 우리의 삶의 방식에 침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각자가 가진 고유의 가치관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완벽히 독립적인 나의 생각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수 많은 텍스트의 메아리 속에서 살게 된다. 책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아도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 그 책에 대한 책, 그 책에 관련된 미디어, 변형된 채널, 영향 받은 작품, 정책, 홍보 등을 통해 강제로 그 내용을 알게 된다.
심지어 피에르 바야르는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그 책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는 저자가 논증을 이끌어가기 위해 다양하고 자세한 예시를 든다. 이 주장을 위해서는 서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티브 족 이야기를 꺼낸다. 바로 이 티브 족에게 햄릿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티브 족은 햄릿을 들어본 적도 없을 뿐더러 햄릿이 쓰여진 시대, 배경, 그리고 작품의 현대적 가치에 대해 완전히 모르는 상태이다.
티브 족은 햄릿의 내용에 대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인다. 이들은 영국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이라면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을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행동에 딴지를 건다.
그런데 이 질문은 그 자체로 흥미롭고 신선하다. 티브 족의 질문은 더 많은 질문과 토론을 부르고 더 나아가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이끌기도 한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 질문을 통해 우리는 티브 족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 질문 자체가 대답이 되고 더 많은 정보를 주는 경우다.
티브 족이 그 책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다른 문화권에 있다는 점은 오히려 그들을 그 책에 대해 제대로 된 논평을 할 수 있는 특권적인 상황에 위치시킨다. (생략) 역설적이게도 텍스트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 그들로 하여금, 물론 그 작품의 어떤 숨어있는 진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해석 가능한 하나의 풍요로운 의미를 보다 직접적으로 얻게 해주는 것이다. (생략) 또한 그들의 그런 발언들이 만약 그들이 책 읽기를 시도했더라면 얻지 못했을게 분명한 어떤 독창성을 그 책과의 만남에 가져다준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인 결론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우선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 이 책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책 자체를 사랑하든, 책 구경하는 것을 사랑하든. 책 읽는 것을 사랑하든, 책 읽는 사람을 사랑하든.
책은 독서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우리가 책을 통해 어떠한 대화를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책을 꼭 표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어야한다는 고정관념이 우리를 책에서 더 멀어지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책의 내용을 검색하거나 요약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창피한 일이 아님에도 우리는 책의 글자를 직접 읽지 않았다는 이유 만으로 수그러든다.
책의 내용을 더 쉽게 가공된 형태로 접했다는 사실이 독서의 본질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책을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책의 정확한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그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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