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페이지로 이루어진 이렇게 밀도 있고 재미 있는 책을 고작 몇 페이지로 요약하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 책이 누구나 책장에 한 권 씩 가지고 있으나 누구도 읽지 않은 책, 예를 들면 '정의란 무엇인가' 꼴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리뷰를 시작해본다. 리뷰가 길어질 것 같아 두 파트로 나누기로 했다. 첫 번째 리뷰에서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두 번째 리뷰에서는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야기를 정리할 생각이다.
호모 사피엔스 역사 상 가장 냉정한 자화상
유발 하라리는 이 책에서 인간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의 기원과 역사를 세 가지 혁명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다. 하라리는 이 세 가지 혁명이 사피엔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피엔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책은 단순히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책은 세 가지 혁명으로 인해 바뀐 사피엔스의 운명은 물론, 사피엔스 외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혹은 사피엔스로 인해 절멸된 생명체의 운명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 때 하라리는 이에 변명하지 않으며 사피엔스를 합리화하지 않는다.
하라리는 철저히 옛 문헌과 객관적인(혹은 객관적으로 보이는) 데이터에 근거한 냉정한 자화상을 그린다. 가끔은 너무나 객관적이고 싸늘해 마치 사피엔스가 아닌 외계인이 쓴 책인 듯 한 인상을 받았다. 하라리는 책 전반에서 사피엔스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다른 종에게 공정했는가?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공정했는가? 만약 이 책의 논지와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이에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가 될 것이다.
인지혁명: 거짓말의 탄생
7만 년 전에 일어난 인지혁명은 ‘허구’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인지혁명 이래 사피엔스는 하여금 창작하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연한 두뇌 회로의 변화(책에 따르면,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로 인해 사피엔스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즉, 실재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에 따르면 그 이전까지 사피엔스의 언어는 실재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 때의 언어로 사피엔스는 나무, 돌멩이, 매머드, 과일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인지혁명으로 인해 사피엔스는 허구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사피엔스는 신화를 만들었으며 자연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능력 덕분에 협력하고 다른 종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협력’이라는 언어 역시 허구이고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능력 덕분에 훗날 사피엔스는 신, 국가, 돈, 인권, 법, 정의와 같은 개념을 상상해내고 지어낼 수 있었다.
의문점: 인지혁명은 유전적 변화인가 밈인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생각해낸 것처럼 어떠한 발명 혹은 발견을 의미하는가?
농업혁명: 거대한 덫
12,000년 전 농업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영구정착을 하게 되었다. 또 가축화, 작물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밀, 싹,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가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 작물은 현재까지 건재하게 인류를 먹여 살리고 있다(그래서 하라리는 사피엔스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사피엔스를 길들인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라리는 이 농업혁명이 사기였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시각은 매우 생소하며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동안 농업혁명을 인류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배웠기 때문이다. 교육은 농업혁명으로 인해 인류가 고달픈 수렵생활에서 벗어나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농업혁명은 인류의 지식과 경험이 바탕이 되어 발생한 긍정적인 혁명이자 인류가 자연을 굴복시키고 길들인 최초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라리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책에 따르면 농업혁명 이후에도 인류는 고달팠다. 수렵생활 보다 더 고달팠으면 고달팠지 덜 고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렵생활 때 과일이 나지 않는 계절이나 사냥에 실패했던 날들에 굶주렸듯이 농업혁명 이후에는 작물이 수확되지 않는 시기에 굶주려야 했다. 잉여생산물이 있더라도 사피엔스는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잉여생산물은 정착생활로 인해 규모가 커진 가족과 공동체를 다 먹이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사피엔스는 한 자리에 붙박여 자유롭게 떠날 수도 없었으다. 이미 커져버린 공동체를 이끌고 이동하는 데에는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작물에게 길들여졌다.
신과 제국주의의 그림자 아래에서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의 결과로 사피엔스의 공동체는 정착하고 급격히 커졌다.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던 사피엔스 공동체는 가상의 존재(신), 가상의 단체(국가), 가상의 신뢰(돈)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다. 그 후 자본주의, 일신교의 지배를 받으며 점점 경제적, 문화적, 정신적으로 제국화되었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제국과 제국주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제국주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에 따르면 우리는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현대의 다양한, 긍정적인 유산은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이렇게 보면 저자가 제국주의를 옹호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하라리 역시 제국주의의 그늘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제국주의에 대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또한 작가는 현대 미국의 제국주의적 관점을 옹호하고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지도 않다. 하라리는 우리가 제국주의의 영향 중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하는 점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뿐이다.
천부인권이라는 모래 피라미드
그렇게 사피엔스는 중세의 신화를 거쳐 인본주의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근대로 넘어왔다.
근대에 인본주의를 등에 업고 일어난 두 혁명(500년 전의 과학혁명과 그 이후에 일어난 200년 전의 산업혁명)은 사피엔스의 삶을 그 이전의 어떤 일보다 더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사피엔스는 자연의 법칙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가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스스로 법칙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사피엔스는 천부인권을 ‘발명’하고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칭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지적 능력이 좋아 생태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자본주의, 자유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위치를 폭력적으로 확인하고 합리화했다.
더 읽어볼 책
호모 데우스 (2015)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는 다른 책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의 스토리처럼 보인다. 1권인 사피엔스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대답해 주는 이야기였다면, 2권인 호모 데우스는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었다.
두 책을 읽으며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폴 고갱, 1897,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라는 작품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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