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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c/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읽은 척 하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 시간을 달리는 테마파크

by Zinc Finger 2018. 7. 25.


리뷰를 위해 위의 두 책과 영어 원문을 참고했다. 왼쪽은 마틴 가드너의 앨리스(주석), 오른쪽은 정병선의 앨리스(주석 및 번역)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책의 주석이 더 훌륭한지 이야기해보자. 주석 자체로는 마틴 가드너의 압승이다. 주석의 양이 더 많고 또 풍부하다. 그러나 번역으로 따지면 (영어 원문과 대조해본 결과) 정병선의 앨리스가 훠어어얼씬 좋다. 이제까지 봤던 어떤 앨리스 번역보다 훌륭하다. 두 책의 목차만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이 리뷰에서는 정병선의 앨리스에 나온 번역을 사용하고 있다.


요약: 주석을 보고 싶거든 마틴 가드너, 앨리스를 읽고 싶거든 정병선을 선택하자. (단, 정병선 앨리스에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수록되어 있지 않음)



시간을 달리는 테마파크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150년의 시간을 달리는 테마파크다. 책이 출판 된 영국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대 대한민국까지 앨리스는 사랑받고 있다. 앨리스는 만화,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창조 되어 왔으며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앨리스를 테마로 한 전시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재밌는 건 루이스 캐럴이 어린 친구를 위해 쓴 "앨리스"가 어린이들 보다 성인들에게 더 인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리뷰를 위해 조사를 하다 보니, 앨리스의 참덕후들 대부분은 수학자와 과학자 아저씨들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앨리스에 나오는 설정이 수학이나 과학과 연관되어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앨리스는 당최 무슨 이야기인가?

모두가 앨리스에 대해 알고 있지만, 동시에 잘 알지 못한다. 어렸을 때 동화책이나 만화에서 본 사람이 대부분이고 실제로 완역본을 읽은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줄거리를 챕터별로 요약해보았다. '뻘소리'라고 표현된 부분은 언어유희거나 정말로 뻘소리이다.


1장 토끼 굴 속으로

모두가 알다시피, 앨리스는 독서 중인 언니 옆에서 노닥거리다가 시계 토끼를 따라간다. 앨리스는 토끼굴 속으로 떨어지고 '마셔요' 음료수를 마시고 엄청 작아졌다가 '먹어요' 케이크를 먹고 엄청 커진다. 그리고 놀라서 엉엉 운다.


2장 눈물 바다

앨리스는 다시 작아지고 아까 자신이 울면서 만들었던 눈물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 댄다. 그러다가 눈물 바다에서 쥐를 만나 뭍으로 올라온다.


3장 코커스 경주의 긴 이야기(꼬리)

쥐와 뭍에 올라온 앨리스는 온갖 날짐승과 길짐승을 만난다. 그 유명한 도도새가 이 부분에 등장한다! 이들은 뻘소리를 해대다가 '코커스 경주'를 하기로 한다. 코커스 경주에서 모두가 승리하고 앨리스는 참가자들에게 사탕을 상으로 준다(정확히 말하면 삥 뜯긴다). 앨리스는 도도새로부터 '골무'를 수여받는다(근데 골무도 사실 앨리스의 것이다). 그 후에 모여앉아 아까 등장한 쥐가 쥐꼬리 모양의 시를 읊는다. 앨리스는 자신의 고양이 '디아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짐승들은 고양이가 무서워 도망간다. 


4장 어리보기 빌 

앨리스는 시계토끼 집에 들어가고(주거침입...?), 탁자 위 이름 모를 음료수를 마시고 몸이 커진다. 토끼는 하인 '빌'을 시켜 굴뚝으로 내려가 보라고 하고 앨리스는 굴뚝으로 들어오는 빌을 걷어찬다. 앨리스는 돌팔매를 맞는데 그 돌이 갑자기 케이크로 변한다. 그것을 먹자 앨리스는 다시 작아진다. 작아진 앨리스는 풀숲에서 보통 크기의 강아지를 보고 도망간다.


5장 털벌레의 충고

그 유명한 털벌레가 등장하는 씬이다. 앨리스는 털벌레에게 '노익장 아버지 윌리엄'이라는 시를 읊어준다(시 내용이 웃기다 궁금하면 읽어보자). 털벌레의 힌트를 통해 앨리스는 버섯으로 몸 크기를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몸 크기 조절을 연습하다가 목만 길어져서 새로부터 뱀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6장 돼지와 후추

앨리스가 공작부인의 집에 방문한다. 공작부인의 집에는 공작부인, 요리사, 체셔 고양이, 아기가 있다. 집안은 후추로 가득하다. 공작부인은 여왕과 크로케 경기를 준비한다며 앨리스에게 아기를 맡긴다. 그런데 아기는 돼지로 변해 숲으로 들어간다. 그 후 체셔 고양이와 뻘소리를 나누고 크로케 경기에서 만나기로 한다. 


7장 횡설수설 다과회

앨리스는 삼월 토끼, 이상한 모자(모자 장수), 겨울잠 쥐의 다과회에 간다. 다과회는 뻘소리의 연속이다. 이상한 모자는 앨리스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까마귀가 책상인 이유는?" 다들 계속 뻘소리만 하자 앨리스는 나무에 달린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8장 여왕의 크로케 경기

문을 열자 장미정원이 보인다. 여왕의 정원이다. 앨리스는 카드 병사들이 장미를 빨간 물감으로 칠하고 있는 것을 본다. 원래 여왕이 좋아하는 빨간 장미를 심었어야 했는데 실수로 하얀 장미를 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왕한테 들키고 여왕은 "저놈들 머리를 잘라라!"를 시전한다. 그 후 앨리스는 여왕의 크로케 경기에 참여하게 된다. 크로케 경기는 홍학으로 고슴도치를 쳐서 카드 골대에 넣는 것이다. 경기 도중 체셔 고양이가 출몰한다.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체셔 고양이의 목을 어떻게 잘라버릴 것인가에 대해 망나니와 왕이 다툰다.


9장 짝퉁 거북의 이야기

앨리스는 공작부인과 뻘소리를 나눈다. 그 후 경기장을 떠나고 '그리폰'과 '짝퉁 거북'을 만난다. 짝퉁 거북은 자신이 다닌 학교에 대한 뻘소리를 한다.


10장 바닷가재 춤

짝퉁 거북의 뻘소리가 계속 된다. 짝퉁 거북은 앨리스에게 바닷가재 춤을 알려준다. 이들은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다.


11장 타트 도둑을 찾아라

장미정원으로 다시 와보니 타트 도둑을 찾기 위한 재판이 열리고 있다. 증인으로 이상한 모자, 겨울잠쥐, 요리사, 그리고 앨리스가 소환된다. 


12장 분연한 앨리스

앨리스는 자신이 증인으로 소환된 것에 깜짝 놀란다. 그래서 갑자기 몸이 커진다. 배심원석이 앨리스로 인해 뒤집힌다(정말로, 물리적으로 뒤집어진다). 앨리스는 이상한 재판에 대해 항의하고 뻘소리를 조목조목 따진다. 여왕이 "저년 목을 베어버려!"를 시전한다. 앨리스는 "너희들이 카드밖에 더 돼?"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꿈에서 깬다(알고 보니 다 꿈이었다식의 반전결말). 옆에서 책을 보던 언니가 앨리스의 꿈을 다시 꾼다.



수학자와 과학자들이(가) 좋아합니다!

주석을 보고 있으면 수학자, 과학자 참덕후분들이 왜 앨리스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앨리스의 모험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고 앨리스의 산수는 우리가 흔히 아는 수학으로는 풀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앨리스의 모험에 과학적, 수학적 해석을 덧붙이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면, 앨리스가 토끼굴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이들은 아인슈타인의 앨리베이터(상대성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장치), 혹은 지구 중심이 뚫려 있고 이곳으로 추락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고민한다.


또, 앨리스가 구구단을 잘못 외우자 우리 덕후분들은 18진법을 통해 이를 해석하며 앨리스가 맞았다고 해명해준다. 수학자 루이스 캐럴이 이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매우 유명한 얘기로, 체셔 고양이는 양자역학(슈뢰딩거 고양이)의 알레고리로 자주 거론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횡설수설 다과회를 보면서 우주 모델(드 시떼 우주 모델)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다과회를 '가상 현실' 프로그램의 배경으로 차용하기도 한다.


심지어 모자 장수의 수수께끼 "까마귀가 책상인 이유는?"을 풀기 위해 학자들은 고민한다. 나중에는 상금을 건 대회까지 열렸다. 루이스 캐럴이 이 수수께끼에 답은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동화로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앨리스는 기본적으로 동화다. 루이스 캐럴이 자신의 꼬마 친구 앨리스 리델을 위해 횡설수설한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낸 것이다. 동화로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여기에서 매력적인 부분을 찾자면 바로 '설정없음'과 '교훈없음'이다.



동화로서의 가치 1: 설정 없는 세상

앨리스가 방문한 (혹은 꿈꾼) 이상한 나라는 규칙도 없고 논리도 없다. 정말 이상하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와 같은 판타지 세계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유명한 히어로물도 그렇다. 이 세계관의 소비자들은 물 샐 틈 없는 '설정'에 죽고 산다. 이들은 작품의 세계관에 열광하고 설정 오류가 있으면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품의 생명력은 '설정'에 힘입는 바가 크고, 따라서 그 설정이 붕괴되면 이야기도 함께 붕괴되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매력은 이 세계에는 설정이 없다는 데 있다. 이상한 나라에는 그럴듯한 설정이 없다. '마셔요'를 마시면 작아지고 '먹어요'를 마시면 커지는 세상인가?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요약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앨리스의 몸이 작아지고 커지는 사건에는 그럴듯한 규칙이 없다. 인물들의 대화에도 규칙이 없고 행동 방식도 이해 불가, 예측 불가다.


이러한 설정 없는 세상은 읽는 이가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상상을 덧붙이든 모두 허용한다. 이상한 나라는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어도 그 자체로 환상적이고, 설정 놀이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 자유롭다. 



동화로서의 가치 2: 교훈 없는 세상

나는 살면서 교훈 없는 동화를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 동화를 만드는 것은 어른이고 이들은 어린이들에게 교훈을 주고 싶어한다. 그 교훈은 방을 잘 치울 것, 부모님 말씀을 잘 들을 것, 친구와 사이좋게 지낼 것, 책을 많이 읽을 것, 다문화 가정 친구들과 어울릴 것 등등 끝도 없다. 간혹 이 포인트에서 벗어난 동화책들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화 역시 결국에는 어떠한 메시지를 주려고 시도 한다. 예를 들면 정보 전달.


물론, 교훈은 좋다. 그러나 아이들을 위한 모든 이야기가 교훈을 담을 필요는 없다. 왜 동화는 훈계와 교훈에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왜 한국은 학습 만화가 아니면 찬밥신세인가? 어른들은 흥미 위주의 웹소설을 읽고 킬링타임 영화를 보면서 왜 아이들을 위한 킬링타임 동화는 없는가?


이상한 나라에는 눈 씻고 봐도 교훈이 없다. 루이스 캐럴은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목적에서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 루이스 캐럴은 정말 아이들을 사랑했고(그것이 소아성애냐 아니냐 논란이 있지만) 자신의 이야기로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아무 교훈도 배우지 않을 뿐더러 성장을 강요 당하지도 않는다.


교훈은 시대를 거듭하며 달라진다. 예전의 한국 교육은 통일 민족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이제는 다문화를 존중하라고 말한다. 겸손은 미덕이었지만 이제는 자기 표현의 시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빛바랜 구시대적 교훈에 발목 잡힐 일이 없다. 교훈 자체가 없으니 시대 상에 구애 받지도 않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시간을 달리는 테마파크가 된다. 아니다, 영원한 테마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