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설정들이 눈에 띈다. '가상의 백과사전' 역시 그 중 한 가지이다.
내가 알고있는 소설 중 총 다섯 개의 작품이 가상의 백과사전을 도입하고 있으며 모두 대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1944 픽션들
아이작 아시모프 1942 파운데이션 시리즈
더글라스 애덤스 1979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 1991 개미 시리즈
발터 뫼르스 1999 캡틴 블루베어의 13과 1/2 인생
가상의 백과사전은 소설에서 단순히 언급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을 준다. 가상의 백과사전을 도입하는 기법은 특별한 화자나 인물을 도입하지 않고도 작가의 세계관과 설정을 독자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세부 설정이 많은 작품의 경우, 특히 판타지의 경우 주인공 옆에서 세계관에 대해 설명해주는 인물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매번 이들의 설명을 대화체에 넣는 것은 작가로서 역량이 탁월하지 않는 한 읽는 입장에서 매우 재미가 없다.
백과사전 설정은 위와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다만 백과사전이 정말 백과사전처럼 단조로운 설명조라면 도입 안하느니만 못하다. 가상의 백과사전에게는 익살 맞은 문체 혹은 신박한 설정, 미스테리가 필수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1944 픽션들
가상의 백과사전에 대한 아이디어가 등장한 최초의 책이 아닐까 싶다.
'가상의 백과사전'이라는 아이디어가 구체적으로 등장한 (내가 알기로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고 또 유명한 초대박대박대작이기 때문에 아래의 작품들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편 중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는 "틀뢴 백과사전"이 등장한다. 이 책은 '우크바르'라는 지역의 언어, 철학, 수학, 문학 등에 대한 백과사전이다. (우르비스 테르티우스는 틀뢴 백과사전의 개정판이다) 백과사전이 직접 인용되거나 간접 인용되며 화자가 우크바르에 대한 미스테리를 풀어나가고 이 곳의 특이한 문화를 언급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고 보니 아래에서 언급할 네 가지 책과는 좀 다른 면이 있다. 이 책은 가상의 백과사전 자체가 글의 소재인 반면 아래의 네 작품은 백과사전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네 작품에서 백과사전은 또 다른 중심 소재를 부연 설명 하는 요소이다.
아이작 아시모프 1942 파운데이션 시리즈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SF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작품이 SF에 미친 부분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역대 SF 작품의 기본 세계관과 설정은 이 시리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파운데이션 시리즈에는 "은하대백과사전"이 등장한다. 해리 샐던을 대표로 파운데이션의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편찬한 은하제국에 대한 백과사전이다. 은하대백과사전은 은하제국의 눈부신 문화, 과학기술을 후손들에게 남김없이 물려주기 위해 기획이 된 대형 프로젝트이다. 은하대백과사전은 파운데이션 시리즈에서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 등장한다. 독자가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배경지식이 발췌 형식으로 제공된다.
더글라스 애덤스 1979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영국식 블랙코미디 SF다.
소설 속 설정이 새로운 편은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SF 장르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작품의 핵심은 작가의 비꼬기, 능청떨기, 그리고 풍자에 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자체가 작품 제목이자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백과사전이다. 종이 책이 아니라 eBook이다. 백과사전에게 원하는 정보를 말하면 그에 대한 시각 자료와 설명이 함께 제공된다.
파운데이션 시리즈의 백과사전은 단조로운 문체의 정보전달용 백과사전이었다. 파운데이션 시리즈에서 백과사전이 인용된 부분이 딱히 재밌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반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실제 작가 더글라스 애덤스의 날카로운 풍자와 개그가 담겨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1991 개미 시리즈
베르베르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은) 대작이다.
개미, 개미혁명 시리즈를 읽고 작가의 천재적인 발상, 특유의 전개 기법에 감탄해 잠을 못 이뤘던 기억이 난다.
개미 시리즈에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등장한다. 이 백과사전은 실제로 인터넷에 존재하며 출판되기도 했다. 설정 상 백과사전 집필자는 에드몽 웰즈라는 학자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매력은 그 내용이 허구인지 진실인지 헷갈린다는 데에 있다. 소설 중간 중간에 튀어나와 소설 개미를 이끌어 나가기 위한 정보, 실마리, 반전이 제공된다.
발터 뫼르스 1999 캡틴 블루베어의 13과 1/2 인생
독일의 천재 작가 발터 뫼르스(발터 뫼어스)의 첫 번째 차모니아 판타지이다.
차모니아라는 가상의 대륙을 배경으로 캡틴 블루베어(푸른 곰)가 자신의 인생을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해준다.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가 가득 실려있다. 발터 뫼르스의 작품이 늘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 익살, 유쾌, 공포, 괴기, 블랙 코미디, 환상, 동심 등 온갖 감정을 다 느낄 수 있다.
캡틴 블루베어의 13과 1/2의 인생에는 "차모니아 및 그 주변 세계의 기적, 존재, 현상에 관한 백과사전"이 등장한다. 책의 저자는 압둘 나흐티갈러라는 천재 학자이다. 이 학자는 아이데트족인데, 뇌가 7개다. 나흐티갈러에게 교육을 받은 후 블루베어의 머릿속에 백과사전의 내용이 이식(?)된다. 주로 새로운 설정이 나왔을 때 독자에게 설명이 필요하거나, 블루베어가 위기에 빠졌을 때 갑자기 튀어나온다. 쓸데없는 정보 같아도 자세히 읽어보면 복선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상이 너무너무너무 재밌다.
'Zinc > 무슨 책을 읽을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 쇼핑] 자포자기에 빠져 중고책을 샀다 (0) | 2019.04.14 | 
|---|---|
| [추천 도서] 책 고르기: 책은 읽어야겠는데,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 (0) | 2019.03.09 | 
| [추천 도서] 발터 뫼르스의 '차모니아 시리즈' eBook/절판/개정판/독일판 정보 (0) | 2019.01.20 | 
| [책 쇼핑] 책 값 때문에 환장하겠다 &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소개 (0) | 2018.06.02 | 
| [추천 도서] 시카고대/카이스트/서울대/포항공대 권장 도서 목록 (0) | 2018.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