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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c/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읽은 척 하기] "시민 불복종(1849)" 리바이어던에 맞서는 고독한 개인

by Zinc Finger 2018. 5. 4.

리뷰제목을 간지나게 뽑아보았다. 리바이어던이 뭐시깽인지 모르더라도 고독한 개인이 어쩌고 일단 뭔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아무렴 이 책 자체만큼 멋있지는 않다.


소로우 선생님의 사진이 뙇 박혀있는 책 표지. 눈빛을 보자.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괴물 리바이어던에 맞서는 고독한 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여기서 '괴물 리바이어던'은 이 사회와 정부를 의미한다. 내가 지어낸 말은 아니고 토머스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1651)"에서 나온 말이다. 홉스에 따르면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사회계약'을 하고 정부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그 계약의 힘은 너무 강력해서 한 개인이 맞서기에는 괴물같이 거대하다. 

소로우는 이 괴물스러운 사회와 정부에 맞서는 우리들의 자세가 어때야하는지 책에서 강력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제목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민 불복종은 말 그대로 정부와 법률에 대한 시민의 공개적인 반항을 말한다. 물론 무조건적인 반항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법에 대한 거부이다. 이것은 소로우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다음 인용구에 명백하게 나와있다.


이 세상에는 부당한 법도 있다. 그런 법에 만족한 채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악법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그러한 노력이 성과를 낼 때까지만 복종할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당장 악법을 어기겠는가?


불의가 타인에게 또 다른 불의를 행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 법은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스스로 그에 반대되는 행동을 취해 조직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어라.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비난해 마지않는 악을 지지하는 짓은 하지 말이야 한다.


한마디로, 부정의와 타협하지 말라는거다. 소로우는 정부가 악법을 시행하고 있다면 그에 복종하지 않고 맞설 것을 주장한다. 여기서 악법이란 부정부패를 포함해 천부인권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이다. 시민에게는 마땅히 그것을 거부할 자격과 자유가 있다. 그 맞서는 방식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방식일지라도.



작가에 대해 아는 척 해야할 점

일단 소로우는 미국 매사추세츠 사람이고 이 책은 원래 소로우가 1849년에 쓴 논문이다. 심지어 소로우가 시민 불복종 행동으로 감옥에 잡혀갔다가 나와서 쓴 글이다. 소로우의 죄목은 세금거부였다.


그렇다면 소로우는 왜 세금거부를 했을까?


나는 노예를 거느린 정치조직인 지금의 정부를 단 한 순간도 나의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 (생략) 국민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이 대가를 치르게 해서라도 미국은 노예제와 멕시코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


소로우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멕시코 전쟁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시민 불복종의 한 방식으로 세금을 거부했다. 음 결국 감옥행.


관전포인트, 소로우 선생님 멘탈이 대단하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아~ 감옥은 이런 곳이구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구나. 생각보다 꽤 안락하네. 정부는 멍충이야. 내가 이런 것에 눈하나 깜빡할 것 같니."라는 식이다. 


그런데 소로우의 평판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한 친절한 이웃이 소로우 대신 세금을 내주었고 하루만에 풀려난다. 



포인트1. 시민 불복종의 정당성

과연 시민 불복종은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사회구성원들이 합의해서 만든 규칙인데 개인적으로 막 무시해도 되는걸까? 소로우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 한다. 


국민이 권력을 쥐면 다수결의 원칙을 허용한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다수가 국가를 지배하게 된다. 이는 다수가 옳을 공산이 가장 커서도, 소수에 비해 공정한 듯해서도 아니다. 힘이 제일 세기 때문이다.


소로우에 따르면 다수가(국가가) 꼭 정당한 것은 아니다. 다수의 의견이 사회적 주류가 되어 있는 것은 '힘'의 논리이지 '정의'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은 다수의 의견에 무조건적인 수긍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 '일단 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라는 핑계로 악법을 따르면서 복종해야할 이유도 없다.


다수결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만연한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 시사점을 던져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수결의 원리가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수결을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을 보면.


그런데 개개인이 이렇게 자신의 양심대로 행동한다면 사회질서는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나로서는 사회라는 조직을 원만하게 움직여야 할 의무가 없다. 나는 이 사회를 창조한 이의 계승자가 아니다. 


대쪽같다. 역시 소로우 선생님. 저 문장만 뚝 잘라서 보면 마치 필요없어! 내 맘대로 막살거야!라는 의미같다. 그렇지만 소로우의 이야기는 그게 아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굳이 악법을 따르고 양심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질서를 무조건적으로 유지해야할 의무가 당최 없기 때문이다.


즉, 소로우는 우리는 사회질서를 떠나서 국가의 부당한 판단에 대해 거부하고 항의할 줄 알아야한다고 말한다. 악법 아래 유지되는 질서정연한 사회보다는 불복종으로 인해 혼란스럽더라도 정의로운 사회가 낫다는 의미이다. 

또한 소로우는 불복종으로 인해 개인적인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그것이 정당성을 외면하고 침묵하는 행위 보다 낫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소로우는 공자를 인용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하게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부유하고 귀하게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공자의 말이다.


그 먼나라에서 공자까지 인용하셨다니 아.. 소로우 당신은 대체...



포인트2. 나는 작은 정부를 원한다

이상적인 정부에 대한 소로우의 기준은 확실하다. 바로 작은 정부이다. 그렇지만 아나키스트는 아니다.


나는 '최소한으로 지배하는 정부가 최상의 정부'라는 격언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생략) 하지만 나는 현실적으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자칭 무정부주의자들의 말마따나 지금 당장 정부를 없앨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정부가 개인을 대하는 태도는 다음과 같아야한다.


주 정부가 개개인을 지금보다 숭고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자신들이 휘두르는 힘과 권력의 주인이 개인임을 깨닫고 마땅한 대접을 해줄 때, 비로소 실로 자유롭고 생각이 트인 정부가 될 수 있다. (생략) 그런 정부라면 국민 중 일부가 정부와 담을 쌓고 살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거슬려하지 않을 것이며, 간섭하기보다는 포용할 것이다.


다시말해, 정부가 다수라는 힘을 등에 업은 채 개인의 자유와 양심을 침해하고 억압하지 말아야한다는 주장이다. 소로우의 생각에 정부와 국가는 그 자체로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것이 아닌 힘을 함부로 행사해서도 안된다. 또 개개인에 대한 존중 없이는 올바른 정부 역시 없다.



포인트3. 행동하는 시민이 되어야한다

대쪽같은 소로우 선생님! 말로만 떠드는 시민은 용납하지 않는다. 심지어 투표만 하는 것도 지극히 소극적인 방법이라고 비판한다. 소로우 입장에서 투표로 국가에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불복종은 아니다.


기껏해야 가만히 앉아 한 표를 행사하며, 자기 옆을 스쳐 지나가는 정의를 무력하게 지지하며 성공을 기원할 뿐이다. 지지하는 이가 999명이라면 행동하는 이는 1명에 불과하다. (생략) 투표는 그저 정의의 승리에 대한 개인적 열망을 무력하게 표현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라면 정의를 운명에 맡겨두지도, 다수의 힘을 통해 정의가 구현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도 '다수'에 대한 소로우의 입장을 볼 수 있다. 노예제도를 부당하게 여기는 소수의 사람이 다수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시간낭비다. 소로우의 입장에서 보면 불복종에 대한 개인적인 피해를 감수하고 기꺼이 행동하는 것이 투표만 하고 돌아와 안락한 의자에 앉아 푸념하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2018년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시민 불복종'은 어떤 가치를 갖는가? 나는 이 책이 1849년에 쓰였지만 여전히 그 눈빛을 잃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있었던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을 언급하고 싶다. 우리는 정부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항의했고 거리로 나왔다. 처음에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고 나중에는 탄핵을 요구했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대로 탄핵 절차가 진행되도록 국회를 압박했고 헌법재판소를 핏발선 눈으로 지켜보았다.


촛불혁명이 과연 소로우가 이야기한 시민 불복종의 실현이었을까? 시위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고 집회시위법률에 위배되는 사건은 없었다. 시민 불복종이라고 하면 폭력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지는 않은가? 소로우는 시민 불복종에 폭력과 위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촛불은 국가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에 대한 개개인의 순수한 분노였고 저항의 집합체였다. 시민들은 정부가 한 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더 이상 우리의 정부를 따르지 않겠다고 당당히 주장했다. 그 촛불집회로 인해 분명히 경제적 손실과 개인적인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움직였다.


촛불혁명은 헌법에 명시된 '저항권'을 행사한 정당하고 아름다운 시민 불복종이었다. 



추가로 언급할 만한 책

토머스 홉스(1651) "리바이어던" 

어떻게 국가권력이 형성되었는지 사회계약론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리바이어던은 사회계약론에 의해 탄생된 국가권력이다. 소로우는 리바이어던에 순응하기 보다는 이를 비판하고 감시하며 정당성에 비추어 항의하라고 주장한다.


존 롤즈(1917) "정의론" 발췌

소로우가 이야기했던 시민 불복종을 롤즈 자신만의 원리로 풀어나가는 부분이 있다. 롤즈는 '무지의 베일'을 근거로 시민 불복종의 조건을 제시했다. 무지의 베일이란 한마디로 네가 이 사회에서 가장 가진 것 없고 못난 사람일 때도 그렇게 하자고 주장할래?이다. 롤즈는 시민 불복종 역시 이 원리에 입각해서 행사될 경우 정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소포클레스(B.C. 441) "안티고네"

그리스 비극 중 하나이다. 국법을 지키라는 크레온 왕과 악법은 지킬 수 없다는 안티고네의 대립을 중심으로 극이 이루어져 있다. 극 중 안티고네는 자발적인 양심에 따라 국법 보다 우선하는 신과 인간의 법에 대해 호소한다. 이 '신과 인간의 법'은 현대적 관점에서 자연법, 천부인권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크레온 왕에 대항한 안티고네의 행동을 시민 불복종의 한 형태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비판거리 혹은 생각해볼 문제들

소로우는 대중의 어리석음와 수동성을 지적하고 지혜로운 소수가 적극적으로 행동해야한다고 주장한다. 1849년이라는 시대상을 감안할 때 일단 소로우의 주장은 어느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그 당시는 소수의 엘리트 계층에게만 교육의 기회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아진 현대사회에서 시민들은 공권력의 정당성에 대해 자율적으로 판단할 만한 지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역량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또한, 천부인권이라는 보편타당한 관점에서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법에 대한 의견은 상충할 수 있다. 악법에 대한 가치판단이 상충할 경우 이것의 판단주체는 누가 되어야하는가? 근본적으로 천부인권에 대한 해석 차이가 발생할 경우에는 어떤 의견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