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고 개인주의에 대한 거창한 연설을 기대했다.
읽다가 갸우뚱해서 책 표지를 보니 '일상유감'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사회적 이슈와 이 세상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과 통찰을 조용히 읊조린 토막글의 모음이다. 깊은 논의가 있지는 않다. 자신의 주장을 객관적인 자료로 증명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냥 어떤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써내려 간 책이다. 그래서 읽기에는 말랑말랑하고 인간적이다. 시니컬한 문장은 안비밀
제목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유석 판사는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개인주의'의 의미가 왜곡되어 통용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책에서 문유석 판사가 말하는 개인주의는 '합리적 개인주의'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대한민국의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자신만의 철학과 가치관을 잃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다. 이 때 이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타인'이라는 또 다른 개인의 행복 역시 존중한다. 그리고 이들은 공동체의 행복과 질서를 위해 '나'라는 존재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야 공동체 속의 합리적인 개개인이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한다.
문유석 판사의 개인적인 성향을 떠나서, 그가 우리에게 합리적 개인주의자를 제안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사회에서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한 마디로, 빠르게 변하는 이 세상에서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안주하며 소시민으로 있지 말고 누군가 삶을 바꿔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감 떨어지기 기다리지 말고 박정희 기다리지 말고 자신만의 코드를 가지고 앞으로 타인과 어떻게 공생해나갈 것인지 '스스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지당하신 말씀.
헬조선에 고함
문유석 판사는 책에서 잊을만하면 우리 헬조선에 대해 일침을 던진다. 이 일침이 상당히 냉소적이다. 일침을 더 느껴보고 싶으면 직접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여기에 인용된 일침은 책의 극히 일부분이다. 주제의 범위가 너무 광활해 글쓴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인용구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을 위주로 주워 담아 보았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집착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
이 정도는 약과.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를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자와 구분하려든다. 가진 것은 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한국의 인종차별, 성차별을 꼬집는 말이다. 문유석 판사는 강한자와 약한자를 구분해 어떻게든 그 틈바구니에서 비교 우위를 차지하려는 대한민국의 세태가 인종차별과 성차별로 이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이념 문제 아닌 것을 이념 문제화하는 강박증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실제적으로 필요한 토론과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각 방안의 장단점을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따지는 머리 아픈 과정을 '우리 편의 주장인지 적들의 주장인지'로 광속 대체하는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논쟁을 진흙탕 싸움으로 만드는 한국의 반지성주의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에서 복지를 주장하면 그 사람은 '빨갱이'가 되고 성평등을 주장하면 '꼴페미'가 된다. 복지를 주장하는 것과 성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뒤의 단어들과 같은 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들의 의도는 뻔하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단어로 상대방의 주장을 수렴시켜 상대방의 주장 자체도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문유석 판사의 말대로 이러한 이념 강박증은 아무런 해결책도 낼 수 없이 서로 감정만 상하도록 대화를 어그러뜨린다.
사실 한국사회의 윤리관은 조폭의 의리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폭을 미화하는 영화가 수없이 제작되고, '의리'가 유행어가 되며, (생략) 웃픈 것은 대단한 나쁜 짓을 해볼 배짱도 없는 소시민들이 이런 식으로 가당치도 않게 조직의 보스에 감정이입하고 동정한다는 점이다.
왜 한국에서 깡패 영화가 그토록 유행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문유석 판사 이야기한 것처럼 힘 없는 사람들이 조폭의리에라도 감정이입을 하고 위로 받기 때문일까?
최근 10년 간 '느와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스크린에 걸린 깡패 영화들이 몇 개인가. 어느 날부터 알 수 없는 불편함 때문에 깡패 영화를 개인적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 목소리 내서 시위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안 본다. 돈 주고 안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 본다. 깡패 의리에 내 시간을 쓰기 싫다. 시나리오가 좋다는 등, 보통 조폭 영화와 다르다는 등 배우들 연기가 멋있다는 등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 눈에는 그냥 다 같은 깡패 영화다. 영화 보는 눈이 별로 없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노오오오오력에 대하여
한물 간 단어지만 '노오력'에 대해 문유석 판사가 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가장 위험하고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처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몇 년 전 한국교육문제 관련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며 피겨퀸 김연아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 자서전과 인터뷰를 긁어모으다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짠하고 불편했다. 결국 자서전을 제대로 읽지는 않았다. 마음이 짠 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내가 유명인의 자서전이나 자기계발서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이 짠 하고 불편했던 것은 조사 과정 중에 노력과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왜곡된 생각, 그리고 김연아로 인해 강화된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노력' '눈물' '의지' '고통'이 언제부터 성공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는지 당황스러웠다. 사람들 말마따나 우리가 성공하고 싶은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라는데. 고통으로 얻은 성공이 그렇게 가치가 있을까? 행복해지기 위한 과정까지 행복할 수는 없을까? 성공을 위한 눈물이 뭐가 도대체 아름답다는 것일까?
헬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결국 취업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이십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박탈감과 불안감 속에서 사회적 약자의 고난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며 자신은 그래도 노력하고 있기에 그들보다는 낫다고 구분짓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그 누구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휘저은 부분이다.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내가 못나서, 공무원 시험에서 계속 탈락하는 것도 내가 못나서, 취업이 안되는 것도 결국 내가 못나서.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되는 것. 왜 우리는 대학 서열화를 탓하는 대신, 공무원에 지원자가 기형적으로 몰리는 사회 구조를 탓하는 대신,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는 사회를 탓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일까.
우리는 다윈을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으로 배웠고 자본주의를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으로 배웠다. 해괴망측한 이야기다. 다윈이든 자본주의든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저런 말은 기성 세대의 왜곡된 교과서이다. 부모님 세대는 '우리 때는-'으로 시작하는 넋두리를 하며 우리 세대가 얼마나 행복한 세대인지 이야기한다. 우리는 국가의 의무 교육을 받고 대개는 굶어 죽지 않는다.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주입 된 기성세대의 일방적인 가치관들이 우리 세대로 하여금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돌리도록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스스로를 상처 입히며 타인의 상처에도 냉정한 소시오패스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책이 젊은 세대를 위로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음과 같은 일침도 날린다.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항변은 요즘 인터넷 일각에서 흔히 보는 '팩트는 팩트다'라거나 '개취(개인 취향) 존중' 운운의 논리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미국 백인 청년이 '슬럼가 흑인이 더럽고 불쾌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개인적 의견을 말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사냥한 역사와 빈부격차, 불평등이라는 맥락에 대한 무지다. (생략) 인간 세상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치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요즘 인터넷에는 '선비질'이라는 용어가 횡행한다. '선비'가 모멸적인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생략)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맽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다음 한 마디는 책의 주제와 글쓴이의 가치관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문유석 판사님. 특유의 냉소주의도 마지막까지 절대 잊지 않으신다.
유토피아는 믿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가만히 있다보면, 상상보다 훨씬 나빠질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스스로 공동구매하지 않으면 강제배급받게 될 테니 말이다.
책은 우리가 어떻게 '주체적인 개인'으로 거듭날지 구체적인 지침을 주고 있지는 않다. 다소 추상적인 내용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집단주의를 거부할 것, 합리적으로 생각할 것, 개인 대 개인으로 존중하고 연대할 것, 시대를 보는 눈을 가질 것, 미래에 대해 고민 할 것.
잡소리&하고 싶은 말
인용을 왕창 해버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안 읽고 읽은 척'인데, 그럼 최대한 책을 안 읽게 해줘야 하는 것 아냐?라고 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중요한 부분이라도 좀 잘라서 읽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래야 읽은 척 구라에도 소울이 생기는 법이다.
+글을 다 쓰고 보니 푸념 한 바가지다. 읽고 있으면 푸념과 불만이 마구마구 샘솟는 책이다. 그리고 현타.
더 읽어보면 좋은 책
"지위경쟁사회" 마강래 (2016)
부제가 '왜 우리는 최선을 다해 불행해지는가'이다. 대한민국이 왜 헬조선이 되었는지 '노동시장, 소비, 학벌, 결혼'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통해 이야기한다. 이 사회에서 비교 우위를 획득하려는 우리의 고통 받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그 저변에 깔린 자본주의적 상대평가 시스템에 대해 비판한다. 새로운 통찰이 있는 책은 아니지만 풍부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주장을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고 재미있다.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또 비교당하는 '집단적 헛수고'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자 선언"과 통하는 면이 있다. 억지스럽지만 그냥 리뷰하다 보니 이 책이 계속 생각나더라...의식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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