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표지에 르네 마그리트의 '꿈의 열쇠' (1930)가 인쇄되어 있다. 각 그림 아래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궁금한가? 문(말 그림), 바람(시계 그림), 새(우유 단지), 여행가방(여행가방)이라고 쓰여있다. 이 작품은 책에서 첫 번째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통한다. 본문을 참고하자.
그나저나 왜 ways of seeing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라고 번역했을까? 차라리 '어떻게 볼 것인가'가 적당할 것 같은데.
책은 총 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개의 장은 글과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나머지 세 개의 장은 이미지로만 이루어졌다. 이 때 책의 특이한 점은 각 이미지에 으레 따라올 작가, <제목>, 제작시기, 제작방법, 가로x세로 따위가 충분하지 않거나, 없다는 점이다.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 역시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뒤에서 바로 이야기할 첫 번째 주제와 관련이 있다.
책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각 장에서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이번 글에서 1), 2)를 이야기하고 다음 글에서 3), 4)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1) 앎과 봄: 우리는 아는 대로 본다
2) 누드화: 남성적 시선과 검토된 여성성
3) 유화의 숙명적 굴레: 유혹하는 그림
4) 이미지 광고와 환상: 자본주의적 예술
막상 읽어도 확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서평은 각 키워드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이미지를 제시하며 이야기를 시작 해보려고 한다. 책에 있는 이미지보다는 내 해석에 따른 이미지를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1) 앎과 봄: 우리는 아는 대로 본다
책의 뜻을 존중해 나도 그림 설명을 달지 않았다. 귀찮은 것이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 선생님의 작품이고, 정말 유명한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제목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의 제목은 '이미지의 배반'이다. 왜 이미지의 배반인가?
그림 밑의 해설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명백히 파이프다. 그것도 엄청 크게 그려있다. 즉, 이미지는 이미지에 대한 설명을 전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감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글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매일 저녁 해가 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광경과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생략)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마그리트는 앎과 봄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간극을 캔버스에 표현했다. '이미지의 배반'이 그렇고, 책 표지의 '꿈의 열쇠' 또한 그렇다.
우리는 지구가 자전을 하며 동시에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밤'이라고 일컫는 시기에 태양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저편을 비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바닷가에서 수평선을 볼 때 태양은 바닷속으로 잠겨 사라져버린다.
우리 눈 바로 앞에서 태양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놀라지도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구가 자전을 하고 태양을 공전하는 이상,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라는 것을 귀납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더 나아가 미술작품에 대한 언어적 표현 역시 우리가 작품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한다.
말이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이미지는 이제 문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감상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림 옆에 있는 설명을 찾는다. 제목은 무엇이고, 누가 그렸고, 언제 그렸고, 무엇으로 그렸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캔버스에 유채, 1503, 77x53 cm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과 글을 아는 사람은 '모나리자'를 다르게 볼 것이다. 전자는 미묘하게 웃고 있는 한 여자를 본다. 반면 후자는 다빈치의 대작 '모나리자 유화 77x53 cm'를 본다.
우리가 그림 옆에 있는 설명을 읽는 순간 그 그림은 바로 그것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이미지로부터 얻는 인상과 해석은 사라지고, 차가운 흰색 바탕의 검정 글씨만 남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위안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언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설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그림에 대해 '아는 것'같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그림에 대해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마그리트는 '이미지의 배반'에서 바로 이것을 익살스럽게 꼬집는다. 우리는 파이프 이미지를 본다. 그리고 곧 글씨로 된 해석을 읽는다. 우리의 지식은 이미지가 파이프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분명히 파이프다.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알고 있던 앎과 봄의 일치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책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기존의 미술비평을 비판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미술작품으로 제시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는 방식은, 미술과 관련해 교육받은, 문화적으로 중요하다고 전제된 몇몇 관념들의 영향을 받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관념들이다. 미, 진실, 천재성, 문명, 형식, 사회적 지위, 취향 등등. (생략) 단어들은 이 그림의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정서를, 체험된 차원에서 벗어난, 이른바 '미술 감상'이라는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미술계는 미술 사조와 어려운 단어를 나열하며 미술을 비평한다. 다다이즘, 신고전주의, 콘트라스트, 에로스, 타나토스, 아르누보, 포스트 모던, 반어적, 모순적 파괴적...
우리는 관객들은 미술계가 만들어 놓은 '앎'을 통해 그림을 본다. 전공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어쩌다 가끔 주워듣는 '미학스러운' 단어 안에서만 이미지를 보게 된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무언가를 좀 아는 것 같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단어들은 우리의 허영심을 채워줄 뿐 우리가 이미지의 본질에 결코 다가갈 수 없게 한다. 오히려 멀어지게 한다. 미학 단어에 매몰되어 이미지를 해석하기 시작하면 이미지는 없고 글만 남는다. 이미지를 그대로 볼 수가 없다. 글을 알게 되고 나서 그림책 감상하는 법을 잊는 것처럼.
2) 누드화: 남성적 시선과 검토된 여성성
다음 두 작품은 기술적으로 매우 잘 그린 누드화이다.
뽀얀 살을 드러내고 누워있는 여자. 살짝 창백하지만 분홍빛이 도는 부드러운 피부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다. 젖꼭지에서 허리, 골반을 따라 두툼한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곡선을 따라 눈을 움직여본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돌아다니는 마쉬멜로우 같은 아기 천사들과 파스텔톤 하늘이 보인다. 물빛 파도 사이의 부드러운 거품이 눈에 띄고 그 위를 넘실거리는 곱슬 머리칼이 젖은듯만듯 헷갈린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벌거벗은 소녀이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군살 없는 알몸이 화면 중앙에서 눈을 사로잡는다. 부드러운 붉은 머리카락이 반대쪽으로 넘어가 소녀의 옆 나신을 온전히 드러낸다. 목과 어깨, 등, 골반, 허벅지, 무릎, 종아리, 발끝으로 이어지는 선이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다. 소녀의 알몸을 중심으로 하얀 말과 붉은 천이 보인다. 말의 붉은 고삐와 안장은 황금으로 화려하게 꾸며있다.
해석이 어땠는가? 그림 제목이나 배경 지식을 걷어내고 철저히 이미지를 중심으로만 해석해보았다. 점잖게 표현하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버리자. 두 이미지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섹시함' 즉, '성적 매력'이다. 두 그림은 결국 벌거벗은 여자를 야하게 그렸을 뿐이다.
이제 배경지식을 갖추어 보자. 위의 그림 제목은 '비너스의 탄생'이고 아래 그림은 '레이디 고다이바'이다. 이렇게 배경지식을 갖게 되면 우리는 그림을 이제 다르게 해석하려고 한다. 위의 그림은 '성스러운 여신의 탄생을 그린 신화 그림'이고 아래 그림은 '백성들의 세금을을 감면해 주기 위해 기꺼이 옷을 벗고 동네를 돈 성녀 그림'이 된다. 이러한 해석은 너무나 뻔히 보이는 두 그림 속의 성적 이미지를 성스러운 것으로 치장한다.
만약 나라면, 정말로 '비너스의 탄생'을 표현한다고 할 때 저렇게 불편하게 누워있는 여자를 그리지는 않을 것 같다. 거품이 이는 바다에서 신 다운 옷을 걸치고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사랑의 신이 있다. 마치'내가 바로 사랑의 신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천사들은 위에서 비너스를 구경하지 않는다. 대신 지상에서 엎드려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레이디 고다이바' 역시 내 취향은 아니다. 나라면 옆 모습 구도를 잡는 것이 아니라 앞 모습 구도를 잡을 것 같다. 이 때 고다이바의 표정이 중요하다.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박애주의를 실현한 소녀의 표정. 소녀는 가슴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는데 그가 수치심을 느낄 이유는 없다. 주변의 말과 장식은 아무래도 좋다. 고다이바의 신념과 정신이 이미지를 지배해야 한다.
비너스와 고다이바에 대한 이미지를 많이 찾아보았지만 대부분이 성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왜 그럴까? 책은 이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던진다.
누드를 그린 보통의 유럽 유화에서 주인공은 절대로 그림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림 앞에 있는 관객이며, 남자로 상정된다. (생략) 즉 그림은 그것을 보는 남자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다. (생략) 이건 자신을 바라보는 상상 속의 남자 - 비록 그녀 자신은 모르는 남자지만 - 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일부러 지어 보이는 계산된 표정이다. 그녀는 미리 잘 검토된 여성성을 구경거리고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야한 사진과 야한 동영상이 없었던 시절, 누드화를 구매해 집에 걸어 놓고 감상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 때 누드화는 평상시에는 커튼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그림 주인은 야한 것을 보고 싶을 때, 혹은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 커튼을 열어 젖히고 누드화를 감상했다. 여성 인체의 아름다움을 운운하면서.
위의 두 누드화가 섹시한 이유는 관객이 남성으로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남성들이 누드화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성적 대상, 성적 판타지이지 당당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화가는 그림 속 여자가 어떤 자세로, 어떤 표정으로 있어야 관객들의 성적 만족을 극대화 시킬지 고민해야 했다. 남성적 시각을 위해서는 이렇게 '검토된 여성성'이 중요했다. 그림 속 인물들의 스토리나 성격, 맥락은 중요하지 않았다.
옛날엔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책은 과거의 여성 누드화에서 현대 여성의 이미지로 넘어온다.
유럽의 누드 예술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의 의식을 형성한다. (생략) 여자를 보는 방식, 즉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즐기려고 하는 시선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여성은 그 남성적 시선을 내면화했다는 말이다. 요즘 화제인 '코르셋 운동'은 여성들이 사회문화적으로 각인 된 남성적 시선을 거두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코르셋 운동의 본질은 여성성에 대한 외재적 검토를 거부하는 자기직면이고 자아비판이다.
위 두 그림에 대한 비평과 현대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에 동의할 수 없는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디어 속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고전적인 표현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미디어 속 여성 구분법은 여전히 성녀(처녀), 창녀, 아내, 어머니이다. 성녀는 처녀 판타지의 대상으로 거의 모든 미디어에 등장한다. 창녀는 성적 대상으로써 이것 역시 대부분의 미디어에 등장한다. 반면 아내는 남성의 순정을 표현하기 위한 대상으로 소모된다. 어머니는 모성애의 표현을 위해 등장하며 미디어 속 여성의 열정과 쟁취, 고난은 흔히 모성애로 귀결되어 버린다.
남성 캐릭터는 섹스어필 없이 나쁜 놈, 착한 놈, 이상한 놈으로 등장할 수 있고 입체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반면 여성 캐릭터의 경우 나쁜 년은 섹시해야 하고, 착한 년은 순종해야 하고, 이상한 년은 등장하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미디어에서 '검토된 여성'을 보고 싶지 않다. 날 것의 '인간'을 보고 싶다.
책과 나의 해석에 동의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 등장한 '퓨리오사'는 내가 원하는 검토되지 않은 여성이고 하나의 주체적인 인간이다. 이 책도 그렇겠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미디어의 전반적인 동향이다. 퓨리오사가 예외로 분리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미디어는 이제 여성성을 그만 검토하고 차라리 스스로를 검토해야한다.
잘 와 닿지 않는 사람을 위해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그림 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 머릿속에서 생각만 해도 좋고 직접 그려 봐도 좋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말이다.
나머지 챕터인 3) 유화의 숙명적 굴레: 유혹하는 그림, 4) 이미지 광고와 환상: 자본주의적 예술에 대한 리뷰는 다음글에서...
[Zinc/: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읽은 척 하기] "다른 방식으로 보기(1972)" 어떻게 볼 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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